7星과 28宿을 봉하게 된 원리와 경과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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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자
- 백동현
- 작성일
- 2013년 9월 1일
- 조회수
- 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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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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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星과 28宿을 봉하게 된 원리와 경과에 대해
48대 단군
* 어젯밤의 꿈에 ''''원리''''라는 제목이 들어간 논문형의 글을 정리하는 선몽을 하고는 ''''논리적인 논문형태의 글''''을 작성하여 내보내라는 뜻으로 해석하여 본 논문을 작성하는 바다.
1. 피신도중 남산 와룡묘행과 주유행으로의 전환
2. 천지의 감응현상과 무학비결, 그리고 건원릉행
3. 천지의 감응현상을 보고 ''''남북통일문제''''로 이해, 두물머리행
4. 등용문행에 나서게 된 연유와 七星을 봉하다
5. 장마(7.7.-7.24)를 종식할까하여 양양행에 나서다
6. 마지막 예정지(행선지)를 앞두고 정동진행에 나선 배경과 주유기 5 정동진행
7. 강릉 남대천행과 28宿을 봉하다
8. 경포대 월파정을 찾다 ''''시루봉''''을 등반하다
9. 28宿의 일부 교체와 누르하치 문제
1. 피신도중 남산 와룡묘행과 주유행으로의 전환
본인이 7.7.-7.27 뜻하지 않은 주유행을 하게 된 것은 이미 밝힌 바 그대로 ''''피신행''''을 위해 집을 나선데서부터 비롯되었다.
피신행을 하기 1주일전부터 본인의 신변 주위에서는 이상한 일들이 진행중이었다. 5.23부터 ''''33 利在田田陣''''을 형성하여 전국적 소통이 진행되고 더욱이 ''''남북 실무회담'''' 1차회담(7.6.1차 회담일)이었던 점에서 비롯된 현상으로 보며, 게다가 중간에 6월말무렵 여러 상황으로 본인이 ''''술''''을 두어번 먹었던 것을 빌미삼아 공격의 시작을 예정했던 모양이다.
그래 7월 초무렵 ''''해당 상황''''을 살펴보니. 그간 2년간 평온했던 본인의 현 주거지에서 ''''갑작스러'''' 부산을 떨게 된 것은 다름 아닌 ''''이미 CCTV''''를 통해 감시해왔음을 직감하여. 7월 들어 ''''면밀히 상황을 지켜보던 중'''' 7월 6일의 움직임은 예사 움직이 아니었다.
소통을 위해 사용하던 모PC방에 ''''불량한 젊은 친구들''''이 들어섰고(이미 6월말부터 기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상주하기 시작한 지 약 1주일일만에), 본인이 분위기가 이상하여 나가서 이동하자 마자 본인의 주거지로 가던 길목의 차량에서 ''''불빛신호''''를 내보내었고. 이에 골목길을 바꾸어 다시 길을 잡자 그 골목에서도 ''''동일한 현상''''이 반복되어. 본인이 주유행에 동행한 이후작에게 그 사실을 전화통화로 전달하자. 이후작이 ''''신변이 위험하니 피신해야 한다'''' 말하고는 오겠다 한다.
그래 일단 주거지(아파트)에 들어가 간단한 차비를 한지 약 1시간이 못되어 이후작이 ''''차를 끌고 왔고'''' 이후작을 따라 나선 시각이 정확하게 7.7. 0:40-1:00 사이의 어느 시점이다(당시 1차 남북실무회담7.6.-7.7. 새벽이 밤샘 회의를 하던 시각이기도 하다).
피신하여 처음 이른 곳은 구리시의 한 모텔이고. 기억에는 그날부터 추적 추적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17일간의 긴 장마가 시작된 날''''이기도 하다. 구리에서 밤을 새우고는 이후작이 남양주로 가자고 하여. 남양주로 이동도중. 중간의 ''''금곡릉''''(명성황후와 고종, 대원군의 분묘지)이 떠올라. ''''금곡릉에 인사부터 하고 움직이자'''' 하여 피신길의 첫 행선지가 금곡릉이 되어버렸다.
구한말 일인에 의해 시해된 ''''명성황후''''를 뵙고 ''''보우 해달라'''' 인사도 드릴 겸 처지도 비슷하여 ''''남양주로 가던 도중에 떠오른 행선지''''였다.
금곡릉에 들러 인사하고 나오니. ''''마음이 다소 안정되어'''' 방향을 틀어 서울 ''''중구''''(동대입구)로 가기로 하여 둘째날은 ''''동대입구의 한 모텔''''에서 지샌 바. 이날부터는 비가 장대비로 내리기 시작했던 기억이다.
그리고 나서는 성신여대를 하루 거쳐 미아동모텔에서 이틀인가 묵었던 기억이고. ''''미아동모텔''''에서 두번째 날에 약간의 소란을 겪으면서. 새벽에 미아동 모텔에서 나와. 면목동의 한 사우나에서 잠시 쉬고는. 갑작스럽게 잡힌 행선지가 ''''남산 와룡묘행''''이었던가 된다. 초기에는 ''''단순한 피신이어서'''' 지나온 행선지를 정리하며 지난 것도 아니니. 이후작이 정리한 자료를 다시 보기 전에는 순서도 기억나지 않는게 당연하다.
주유 6일차에 재차 남대문 근처로 나왔다가. 감작스레 생각난게. 우리측이 모시고 계신 양반이 ''''치우단군''''이시기에 단군선배에게 인사도 드릴 겸. 와룡선생과 관운장도 계시다 알기에 ''''함께 인사도 할 겸하여'''' 남산 와룡묘행이 결정 되었던 것이다.
당일 남산 와룡묘로 올라간 길은 명동역에서 호텔골목을 지나 가면. ''''중국 영사관''''이 나오게 되고. 거기서 남산 둘레길을 건너가 남산등산을 하면. 재차 둘레길이 나오고 그 위에 ''''와룡묘''''가 있다. 당일의 자세한 상황은 ''''주유기 첫번째''''에 있으나 아래에 원문 그대로 첨부한다.
주유기에서도 밝힌 그대로, 남산 와룡묘에서 내려오며 ''''오늘은 또 어디서 묵나!'''' 라고 말을 주고 받으며 내려오자 (약 30보 거리정도) 뭔가 보이는게 아닌가! 그래 자연스레 발길이 닿아 가보니 ''''조치훈선배의 파초우 詩碑''''가 있었고. 시비의 내용에 적힌 ''''오늘은 어디메서 쉬리라던고''''라는 문구를 보고는 깜짝 놀랐던 것이다.
"어제(7.12.)는 장마비도 추적거리고 세상사의 시름도 많아
유랑객 신세이나 단군성조, 와룡선생(제갈공명)과 관운장를 함께 뵙고자 남산에 자리한 와룡선생에게 들렀소!
때마침 아셨던지 방문일인 12일 오전에 ''''낙석(落石)''''이 있어 다 오르지 못하고 비문(碑文)에만 예하고 내려왔소!
와룡선생을 뵙고 내려오며 수행비서를 쳐다보며 ''''오늘은 어디로 길을 잡나!''''그러면서 내려오다 뭔 ''''시비(詩碑)''''가 있어 잠깐 둘러 보았는데 놀라운 일이 하나 더 생겨 특기(特記)하오.
발걸음이 가기에 다가가 보니, 다름 아닌 ''''조지훈시비''''가 아니오. 그래 시비 정면으로 돌아 보니 다름아닌 ''''파초우(芭焦雨)'''' 시를 새겨넣은 시비(詩碑)인 바. 놀랍게도 첫구절이 "이 밤을 어디에서 쉬리라던고"라 적혀 있는 것을 보고는 기절초풍할 뻔 하였소.
지훈선생에게 우리 일행의 마음을 들킨 듯도 하고 "어찌 오늘의 처량한 신세와 마음을 알고 여기에다 시비(詩碑)를 세우셨나!" 그 은덕(恩德)에 감사의 예를 하지 않을 수 없었소" (주유기 1중에서)
우리가 발견했던 ''''파초우''''와 ''''파초우시비''''는 첨부하여 둔다.
파초우(芭焦雨)-조지훈-
외로이 흘러간
한송이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성긴 빗방울
파촛잎에 후두기는 저녁 어스름
창 열고 푸른 산과
마조 앉아라
들어도 싫지 않은
물 소리기에
날마다 바라도
그리운 산아
온 아츰 나의 꿈을
스쳐간 구름
이 밤을 어디메서
쉬리라던고
<남산 둘레길 와룡묘 입구에서 약 30보 떨어진 곳에 세워진 파초우 시비 전경>
2. 천지의 감응현상과 무학비결, 그리고 건원릉행
6일차 ''''남산 와룡묘행''''에서 놀라운 체험을 하긴 했으나 단순히 ''''치우단군과 와룡선배''''등이 보우하시는 것으로만 이해했고, 그날도 숙박처를 찾아 청구행을 했다 마땅치 않아 강남으로 가서 방배동을 거쳐 최종 사당동의 한 모텔에서 숙박했다(기억에는 주유기는 7일차 사당동의 한 PC방에서 작성하고는 이동했던 기억이다).
8일차에도 숙박을 본래는 ''''과천을 지나 인덕원에서 할려고 했다'''' 마땅치 않아. 재차 서울 신림동으로 가려던 도중 ''''봉천동''''을 지나면서 봉천에서 유숙했다.
봉천동에서 밤을 새웠으니. 9일차인지에는 당연히 ''''관악산행''''을 택하게 된 것이고. 올라갈 때는 추적거리던 비가 ''''관악산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천둥''''이 치면서 거세게 왔던 기억이며, 이때부터 무슨 천지가 ''''감응(感應)하는 현상''''으로 감지하기 시작했다.
10일차인지에는 본래 효창공원에도 들러볼까하여 ''''남영동''''에서 묵고. 이유는 잘 기억이 안나지만. 효창공원에는 안들르고 외곽으로 나가기 위해 ''''수락산행''''을 택했다. 수락산은 ''''이후작''''이 자주 갔던 모양이고. 서울 외곽에 나오니 ''''마음이 한결 여유가 생겨'''' 지나온 여정을 살피고. 그 와중에 ''''무학비결'''' 얘기가 나오게 된 것이다.
무학비결에 대해서는 본래 본인은 ''''辰巳聖人出'''' 정도만 알지 잘 알지 못하던 비결이고, 이후작은 모 종교기관에서 수년 수행을 한 경력이 있어 주목했었던 모양이다.
무학비결에 관한 본인의 지식 중 특이한 것은 ''''단재 신채호''''도 1928년 무진년인지 새해를 맞으며 <무진년 새해를 맞으며>인지 하는 글에서 ''''진사성인출''''이라는 비결을 인용하며 글을 쓴 부분이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어서. 그 자료를 보면서 특이하게 생각했던 적은 한번 있다(본래 단재 신채호도 연구주제 삼아 공부한 적이 있기에 단재전집을 꼼꼼하게 보았기에 발견한 것이다). 이는 ''''무학비결''''이 식민지시절부터 줄곧 세간에서 운위(云謂)되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수락산의 모텔에서 인지 ''''무학비결''''을 비로소 처음 전체를 꼼꼼하게 살피던 중. 발견한게 바로 "목자장군검(木子 將軍劍)이요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이라"이라는 문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논의하여 본 결과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은 바로 ''''조지훈 시비(파초우시비)''''이고. 우리의 다음 행선지는 ''''목자장군검(木子 將軍劍)''''인 바. 이는 간단하게 해결했던 것이다. 다름아닌 ''''태조 이성계의 묘''''인 동구릉 건원릉을 지칭하는 것임을 금방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무학비결이 본인과 연관된 비결임을 알고부터는 ''''무학비결''''중 ''''인묘사가지 진사성인출 오미락당당''''의 문구가 새롭게 들어왔다. 당시 ''''하루 하루 피신하던 임장''''이라 하루 하루의 간지의 특성으로 해석하고 돌아다니게 된 것이다. 또 나오던 날의 간지를 확인하고 나왔던 바, 7.7이 갑술일(甲戌日)이었는데. 그날 ''''아시아나기 항공사고''''가 발생하여 인명피해가 났으니 어김없다 여기고. 이는 주유행 내내 ''''날의 간지''''를 챙기며 돌아다니게 만든 비결이기도 했던 것이고 여러모로 ''''무학대사''''에게 감사하게 여기던 중 ''''28宿''''으로 봉해 드려 참 다행이고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은 셈이다.
다시 말하여 ''''수락산 이후의 행선지''''들은 단순한 피신행을 위한 길이 아니라 ''''주유행''''을 위한 여정이 되었던 것이며, 그 첫 여정이 당연히 ''''동구릉 건원릉''''으로 잡히게 된 것이다.
다행히 무학비결이 짤막한 비결이니 ''''전편''''을 첨부하고자 한다.
<무학비결>
유시왈(有詩曰)
황사난면서절구(黃蛇難免鼠竊寇)요
금마가견용음애(金馬可見龍吟哀)라
신유병사기(辛酉兵四起)요
술해인다사(戌亥人多死) 하며
자축유미정(子丑猶未定 )이요
인묘사방지(寅卯事方知)라
진사성인출(辰巳聖人出)하니
오미락당당(午未樂堂堂)이라
태조수하재(太祖數何在)요
원시사백년(元是四百年)이라.
년사백이후(年四百以後)에
북적위전친(北賊爲全親)하리라
갑을하시도(甲乙何時倒)요
천범회남주(千帆會南州)라.
망망창해상(茫茫滄海上)에
일야도천범(一夜到千帆)이라.
무기진사상(戊己辰巳上)에
난룡기합문(亂龍起閤門)이라.
삼전삼내고(三奠三乃古)가
내응멸삼한(內應滅三韓)이라. .
목자장군검(木子 將軍劍)이요
주초대부필(走肖大夫筆)이라.
산추모일검(山椎謨一劍)하면
혈류종삼춘(血流終三春)이라.
여시삼일객(如是三一客)이
능제능정지(能除能定止)라
진사군하거(辰巳君何去)요
오미락당당(午未樂堂堂)이라.
청의자남래(靑衣自南來)하니
사승즉비승(似僧則非僧)이요
백가병일우(百家幷一牛)에
십녀봉일부(十女奉一夫)라
소승수불초(小僧雖 不肖)나
무개소승언(無改小僧言)하라.
무학비결을 알고 잡은 첫번째 행선지인 ''''동구릉 건원릉''''에 갈 무렵에는 본인이 갑자기 설사가 발생하여 2-3일간 고생중이던 와중이라. 해당 일정을 하루에 소화하지 못하고 ''''사우나''''에서도 쉬다 ''''광개토대제상''''을 보고. 하루를 다시 어디에서 묵었다가 다음날 일찍 ''''동구릉''''을 방문했다.
이미 ''''천지의 감응현상''''을 감지하고 방문했던 동구릉 방문길에 또다른 ''''천지 감응현상''''을 확인하고는 천지의 감응이 이유가 있음을 알기 시작했던 것이다.
동구릉에서의 천지의 감응현상은 ''''동구릉을 들어섰으나'''' 천둥소리도 안 나, 홍살문근처에 이를 무렵 ''''오늘은 어째 천둥소리도 안나네!''''라 말하고 수초후에 ''''천둥소리''''로 인사하는 것을 목도하게 된 것이다.
당시의 정황에 대해서도 ''''주유기 두번째(7.20 작성문서)''''에 잘 나타나 있어 아래에 원문 그대로 첨부하고자 한다.
중간에 밝히지 않았으나 13일차에는 ''''동구릉 건원릉(태조 이성계묘, 이영배 백작의 선조기도 한 인연도 있고)''''을 둘러보고는, 유랑 14일차에는 ''''어디로 가야 하나'''' 잠시 사색을 해보았소.
세간에서야 믿기 어려울 지는 모르겠으나 이미 밝힌 바 그대로, 6일차인지 들렀던 목멱산 와룡묘에서 ''''(단군)하늘의 조화''''를 본 바도 있었고, 일부러 중간에 밝히지 않았으나 기실 관악산 등반길에 들어서 관악산 입구로 들어서자 마자 ''''천둥''''이 울렸던 바도 있고. 13일차 방문했던 동구릉 방문길에는 동구릉을 들어서고도 비는 오나 ''''천둥소리''''가 들리지 않아 홍살문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수행비서를 둘러보며 농담삼아 "오늘은 어째 천둥소리도 안 나네!"라 농담을 건네자 서너걸음을 걷기도 전에 아니나 다를까 ''''천둥소리''''가 들리는 현상을 재차 목도하고는 그간의 유랑과정에서 본 바가 속설에 내려오는 ''''천지가 감응(感應)하는 현상들''''임을 재삼 확인한 상황이기도 했기에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였소.
고심끝에 ''''두물머리''''를 방문하기로 확정하고는 양수리에서 밤을 묵고는 ''''두물머리''''를 들렀다 나왔소.(유랑 14일차에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둘러보며 소회하다(7.20.))
3. 천지의 감응현상을 보고 ''''남북통일문제''''로 이해, 두물머리행
남산 와룡묘행 이후 동구릉 건원릉행 등을 통해 ''''하늘의 감응''''을 통해 천지의 움직임을 확인하고는 자연스레 ''''두물머리행''''을 택한 것은 어쩌면 ''''고려연방국 蘇塗廳 48대 檀君'''' 입장인 본인으로서는 자연스런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래 동구릉행을 하고는 재차 구리에서 일박을 하고는 ''''양평행''''길을 잡아, 주유 14일차엔가에 ''''두물머리행''''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두물머리행''''을 하면서부터는 주유기에서도 언급했듯이, 옷가지 세탁을 위해 이후작의 집(남양주지역 소재)에 우산을 놓고와서 양평에 들르면서 ''''밀짚모자 2개''''를 구입하여 쓰고 다녔던 바, 놀랍게도 당시까지도 중부지방의 장마는 지속되었든데 우리 일행은 주유 15일차부터는 ''''밀집모자만으로도 비 한 방울 안 맞았다''''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14일차 ''''두물며리''''를 방문했던 날에도 ''''하늘이 청명하고 해까지 나와'''' 팥빙수로 더위를 식혔다는 소리가 허언이 아니었던 것이다.
본인은 본래 ''''두물머리행''''(북한강과 남한강의 합수 지점, 음을 따서 남북의 통일기원행이기도 했다)으로 주유의 목적이 실현된 것으로 알고는 ''''개인사를 위해 용문행으로 다음 일정''''을 잡게 된 것이다.
4. 등용문행에 나서게 된 연유와 七星을 봉하다
양평 두물머리행이 14일차 오전이라, 일찍 이동하여 용문산에 와서는 ''''여기는 편한 곳이니 2박을 하자'''' 결정하고는 당일날은 편하게 쉬고, 15일차에 ''''용문산 등반행''''을 하기로 결정했다.
등용문행(登龍門行)은 다름아닌 ''''본인의 개인사들이 해결되고 48대 檀君의 지위에 걸맞게 지내게 되기를 기원하는 여정''''이었던 것이며, 이는 한편으로 보면 ''''주유행을 통해 두물머리행으로 주유의 목적이 끝난 것으로 이해했기에'''' 등용문행을 선택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용문산행을 했던 날(15일차)이 하필 날의 간지가 ''''子''''날이라. 이후작에게 ''''오늘은 날의 간지도 그러하니 일찍 등반하고 未時(오후 1시-3시) 이전에 내려와 여관에만 박혀있자'''' 얘기하여 오전 일찍 등반을 시작하여 11시를 좀 넘긴 시각에 하산하여 용문사 일주문 근처에서 ''''쑥개떡과 송편으로 점심을 떼우고는'''' 오전 12시 무렵부터는 여관에서만 묵게 되었던 것이다.
대략 샤워도 하고. 뉴스를 보려고 채널을 켠 순간 한 채널방송에서 ''''대조영''''드라마를 내보내는게 아닌가! 그런데 해당 편이 마침 ''''연개소문의 죽음편''''이라. 잠시 연개소문 얘기하다 생각해보니. 우리의 여정이 ''''단군, 제갈량, 관운장, 이성계, 광개토대제 그리고 연개소문''''으로 이어진게 아닌가.
해당 상황을 보고는 본인이 48대 檀君인 입장이니, ''''高麗聯邦國 7社堂''''으로 모시라는 소리가 아닌가 자연스럽게 연상하게 되었던 것이다(본래 전통사회의 국가는 종묘와 사직을 중시한 바. 사직이란 지신을 의미한다).
본인이 그 얘기를 하던 순간, 이후작이 갑작스럽게 ''''중국의 당태종이 그 신하 24명으로 24節期 신명을 봉했던 고사''''를 얘기해주고(해당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는 그 후에도 별도로 확인한 바 없어 자세한 정황등은 아직도 모른다), 이에 본인이 ''''高麗聯邦國 7社堂''''이 다름아닌 ''''7星''''임을 감지하게 되었던 것이다(본래 단군하늘이 곧 자미원하늘(七星하늘)임을 알고 있던 입장이기도 했기에).
해당 사실에 대해 확신을 하고는 ''''七星의 순서를 어찌할까'''' 잠시 사색하다. 우리일행이 주유한 순서대로 정리하여 ''''七星의 위치''''를 정하자. 이른바 ''''천지의 감응현상''''이 재차 일어났던 것이고. 해당사안에 대해서는 주유기(주유기 3편 및 7社堂과 28社堂을 봉하게 된 경위 문제에 대하여. 이하 ''''경위에 대하여'''')에서도 밝힌 바 있어 아래에 첨부해 둔다.
또한 제목을 ''''高麗聯邦國 7社堂''''이라 한 것은 굳이 대외에 그런 내용을 밝힐 이유는 없을 듯하여, 본래 제목을 그래 확정하였고 때가 되면 ''''七星''''임을 밝히려고 그렇게 내보내게 된 것인데 비교적 이른시기에 실체를 밝히게 된 것이다. 주유기를 다시 확인해 보니. 당일에는 ''''고려연방국 7사당 봉'''' 사실만 전달하고 자세한 상황을 전달하지 않았고 양양행 이후에 내보낸 주유기 4편에서야 조금 진실을 밝히고 있기도 하다.
아래에는 주유 15일차 ''''高麗聯邦國 7社堂 봉''''사실을 정리하여 내보낸 7월 21일 자의 ''''7사당 봉기''''를 첨부한다.
소도령 2013-378 高麗聯邦國 7社堂을 다음과 같이 봉함
치우단군, 제갈량, 관운장, 이성계, 광개토대제, 연개소문, 이순신
순서를 정하여, 7사당을 봉하니 그 순간 ''''하늘이 열리고 빛을 비추어'''' 허락하신 단군하늘에 머리 숙여 감사의 인사를 표(表)하도다.
* 비서도 우리가 묵은 산방의 창문을 통해 빛을 비춤을 함께 보다.
* 오늘을 기려 每年 7월 21일(未時)에 제(祭)한다.
2013.7.21(戊子日, 未時).
周遊 15일차에
용문산 환희여관에서
高麗聯邦國
蘇塗廳
48대 檀君
5. 장마(7.7.-7.24)를 종식할까하여 양양행에 나서다
등욤문행에서 ''''고려연방국 7사당''''도 봉하고, 당일의 하늘의 감응현상등을 보고는 천지의 감응에 대해 ''''완전하게 확신했기에'''' 다음 일정으로 ''''양양 해맞이행''''을 해야 함을 알게 된 것이다.
고려연방국 7사당을 봉(7.21., 주유기는 22일 용문시내에서 작성하여 올린 기억이다)한 이후, 양양행을 하기 전에 ''''잠시 중간 기착지''''가 필요하여 기차역과 고속버스터미날을 선택하다 ''''고속버스터미날''''을 이용하려고 ''''홍천행''''으로 최종 길을 잡았다. 본래는 여주, 원주등도 다 생각하다 결정했던 것이기도 하다.
세간에서야 이해가 안될지 모르겠으나 이미 ''''천지가 감응 중''''이라 우리가 양양에서 ''''해맞이''''를 해야 ''''해가 나오게 될 것''''임을 이미 알고 행선지를 잡았다는 얘기다. 더불어 마지막 행선지로 ''''강릉행''''정도로 생각하고 영동(강원도)을 넘어가게 된 것이다.
당시의 행선지를 잡았던 ''''연유''''에 대해 예시적으로 작성된 주유기 5편(登龍門행이후 홍천행과 양양행에 들었소!!!(7.23.))을 첨부하면 대략 짐작이 되리라 본다. 당시의 주유기는 7.23. 자로 ''''속초 해맞이 공원''''에서 해맞이행사를 한 24일보다 하루 앞서 속초에 도착하자 마자 작성한 주유기다.
登龍門행이후 홍천행과 양양행에 들었소!!!
15일次에 登龍門과 7社堂을 봉한 이후, 속초행(양양행)을 해야함을 알게 되었으나 ''''때가 이르지 못함''''을 알고는 홍천(洪川)에서 하루 묵어야 함을 알았소!
그래 홍천행을 하루 하고는 17일차인 오늘 홍천에서 속초(양양)으로 가는 고속버스편을 이용하여 주유행을 이어간 바, 인제의 ''''내린천''''을 유람하며 ''''미시령''''을 넘어 영동에 이르게 되었소.
새로 뚫린 미시령 터널을 막 넘으니, 여진히 ''''안개''''로 뒤덮여 말 그대로 ''''오리무중(五里霧中)''''이오.
우리 일행이 양양(陽壤)에 이르렀으니 내일(24일)부터는 ''''해''''가 나오게 됨을 가히 알 법도 하오!!!
* 우리 일행이 ''''나가는 때''''가 궁금들 하오. 때가 되면 나가게 되니, 걱정들 할 거 없소!!!
2013.7.23.
주유 17일차에
高麗聯邦國
蘇塗廳
48대 檀君
6.마지막 예정지(행선지)를 앞두고 정동진행에 나선 배경과 주유기 5 정동진행
주유 17일차인지에 양양에 가서 ''''속초 해맞이 공원''''앞의 ''''해맞이 민박''''에서 유숙하며 고민거리는 ''''대략 21일을 채워야'''' 나가게 됨을 알게 되었으나 날짜가 많이 남아 고심하게 된 것이다. 즉 그 다음날 해맞이 행사를 마쳐도 18일차이니. 남은 시간을 다 채워야 하는게 사실 고민거리였던 것이다.
그런데 ''''해맞이 민박''''에서 유숙하며 뉴스를 보다 놀라운 뉴스를 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다름아닌 ''''모래시계의 김종학PD의 자살소식''''을 접하게 된 것이다. 그날이 바로 24일로 넘어가던 자정 막 넘어 선 시각의 뉴스였고. 그래서 ''''해맞이 행사''''후에는 행선지로 ''''정동진행''''으로 결정되었던 순간이기도 하다. 자세한 상황은 언급을 자제하겠으나 우리가 주유행 중 유난히 사건사고도 많아 ''''용인의 모 청소년의 범죄사건(이른바 포를 뜬 살인사건)''''은 단순사건이 아니라 보던 입장이라 예민하게 뉴스를 보던 상황이었음만 밝혀 두겠다.
예정대로 24일 새벽 ''''해맞이 공원''''에서 해맞이 행사를 하고 재차 들어와 쉬었다가 24일 11시 무렵 일어나 나가 보니, 예상대로 ''''해가 뜨겁게 나와'''' 17일간 지속되었던 장마가 멈추었음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7. 강릉 남대천행과 28宿을 봉하다
정동진행 이후 7월 25일에 ''''강릉 남대천행''''에 나선 것도 순전히 우연의 문제였다. 정동진이 문제가 하나 있는데, 휴양지라 PC방이 없었던 것이다.
정동진에 들어갈 적에, 다음날인 7월 25일에 ''''남북 실무회담 6차일''''이라 주유기를 내보내야 하던 입장이라 들어가면서부터 ''''PC방''''을 찾아 보았던 바, 없어서 다응날은 일찍 나가기로 작정하고 ''''하얀미소펜션''''에서 유숙했던 것이다. ''''하얀미소펜션''''에서도 현재는 소*청 앨범방에 비치중이기도 한 그 유명한 ''''상량문(12월 23일 상량)''''을 발견하고는 재차 놀라기도 했다.
7월 25일 주유기를 내보내려고 오전 11시경에 강릉시내에 도착하여 ''''주유기6편''''인지를 내보내고 나니. 시간이 오후 1시 가까이 되어 ''''간단하게'''' 점심식사를 마쳤는데도 오후 2시가 안되어 고민스러웠다. 그래 강릉 경포대를 가기 전에 ''''강릉 단오제'''' 행사터인 ''''남대천''''에 들러서 하루를 묵고 그 다음날 ''''경포대''''로 가기로 행선지를 확정했다.
본인이 ''''친일재산조사업무'''' 할 당시에 ''''강릉 단오제'''' 관련 자료를 모아보았던 적이 있기도 하여, ''''강릉 단오제''''를 주목했고 그 무대가 ''''남대천''''임은 익히 알고 있던 바라. ''''치우단군''''께 ''''7社堂 봉후'''' 인사도 드릴 겸하여 막걸리 한병을 구입하여 인사차 남대천에 들렸던 것이다.
그래 이비서와 함께 막걸리를 따르고 ''''예를 취한 후'''' 남대천에 ''''창포다리''''가 놓여 있어 건너는데 당시 창포다리에 내걸린 깃발이 ''''유난히'''' 나부낌을 보고는 ''''치우단군''''께서 감응하신 것으로 알고 건넜다(주유행이 끝난 후 사진자료 확보를 위해 확인해 보니, 남대천의 창포다리는 2013.6월 첫 개통한 다리였다, 관련 자료와 깃발도 소*청 앨범방에 주유행이후 찾아 비치중이다).
그래 창포다리를 건너 유숙처를 찾다 보니, ''''영빈장모텔''''이란 곳이 앞에 ''''해태상 2기''''도 놓여 있고 마음에 들어 유숙하려고 들어가다 보니 ''''객실로 올라가는 입구''''에는 이번에는 두꺼비 두쌍이 놓여 있어 특이하다 그러면서 유숙하게 되었다(관련자료도 소*청의 시루봉 사진 하단에 영빈장모텔 사진도 함께 비치중이다. 이 사진이 주유도중 찍었던 귀한 사진들 중 두물머리, 정동진행에 이은 세번째 사진이고 시루봉까지 포함하면 사진촬영한 4-5곳 중 하나이다).
7월 25일이었던 당일의 일정이 일찍 끝나 ''''영빈장모텔''''에 유숙처를 정하고 식사하러 바깥에 나와 식사를 하고는 ''''야간산책''''차 다시 남대천변을 거닐고 ''''앞서 건넌 창포다리를 건너'''' 돌아오려고 창포다리에 들어서 건너던 도중 ''''깃발의 숫자''''가 궁금하여 동행중이던 이후작에게 ''''깃발 숫자가 몇개냐?'''' 물었더니. ''''한쪽이 14기''''라고 그런다. 다리 양쪽으로 내걸었으니 당연히 합치면 ''''깃발 28기''''가 꽂혀있었던 셈이다.
그 순간 ''''28宿''''마저 봉하라는 의미라고 생각이 들어. 영빈장 모텔에 들어오자 마자 ''''28숙 명단''''을 작성하여 수회 토론을 거듭하여 ''''28숙 1차 명단''''을 작성했던 것이다. 당시에도 ''''외국의 인물들도 봉해야 하나'''' 잠시 사색도 해 보았던 바, 6자간의 합의문서였던 ''''창준위 3호문서''''와 ''''창준위 9호문서''''를 매번 위배하고, 게다가 2012.6.30.자로 ''''高麗聯邦國體制''''가 발효조치된 상황임에도 ''''신변의 안위문제''''까지 발생하여 피신중이던 입장이라 ''''외국의 인물은 봉해 주고 싶은 마음이 나지 않아'''' 고려연방국 선배 중심으로 봉하게 되었던 것이다.
(주유행이 끝나 돌아온 후, 인터넷 검색을 통해 확보하여 현재 소*청 앨범에 비치중인 ''''남대천 창포다리의 깃발'''' 전경, 사진에 보이는 부분은 창포다리의 일부이며 전체를 합하면 28기의 깃발이 나부낀다. 창포다리의 개통일은 2013.6.로 나타나고 있다)
8. 경포대 월파정을 찾다 ''''시루봉''''을 등반하다
대략 용문행 이후 ''''삼칠일''''을 경과하여 나가게 됨을 알고는 ''''마지막 여정''''으로 잡았던 강릉 경포대행에 나선게 26일이고 주유시작 20일차였던 날이기도 하다.
경포대행에서 경포대를 둘러보느라 끝에 이르자 ''''강문항포구''''(경포대로 물이 유입되는 지점, 강문솟대다리)도 나오고 ''''강문 솟대다리''''를 구경하는 도중에 ''''경포대 안내판''''이 비치되어 살펴보니. ''''월파정''''이라는 지명이 눈에 들어온다. 그래 ''''월파정''''이 얼마나 아름다우면 표지판이 되어 있나 궁금점도 생기고 하여. 이후작과 ''''월파정 좀 찾아가 보세!''''라 하여 월파정을 찾는 여정이 시작된 것이고. 그것이 ''''시루봉 발견과 알바위 2기 발견''''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월파정''''을 찾느라. 경포대 근무 해양경찰등에게 물어봐도 ''''아무도 답을 못해 주기에'''' 우리가 직접 찾느라 헤매는데. 뭔 정자가 있다 하여 가보니 ''''금란정''''등의 정자는 발견했으나 좀체로 월파정은 나오지 않는다. 그래 한참을 거니는데 갑작스레 ''''시루봉''''이라는 푯말이 나타나 일정이 ''''시루봉''''으로 변해 버렸다. 아마도 경포대를 보러 갔다가. 거기서 ''''시루봉'''' 푯말을 찾았던지. 시루봉으로 찾느라 길을 잘못들어 ''''민가''''로 가서. 어르신께 물어보니 ''''시루봉 가는 길''''을 알려 주어 어렵사리 ''''시루봉'''' 정상에 도달하니. 산은 낮은데 ''''웬 알바위 2기가 덩그러니 있는 모양''''을 보고는 기함을 토했다.
알비위 2기를 보자마자, 한편으로는 ''''우리 일행의 처량한 신세''''를 보는 듯도 하고 대락 감지하고 있었듯이 ''''주유가 여기서(삼칠일만에) 끝나게 됨''''을 재확인하게 되고는 주유행을 마감하기로 확정한 날이기도 하다.
<강를 시루봉 정상의 알바위>
그래 강릉에서 하루를 묵고 27일 귀경하려다. 여러 상황을 감안하여 하루를 더 유숙(마지막 유숙처는 남대천변에서 가까이 있는 ''''황실사우나''''다)하고는 7월 28일 본가로 귀가하게 되었던 것이다.
9. 28宿의 일부 교체와 누르하치 문제
본인이 귀경하여 ''''주유기''''등으로 4주 가까이 소통을 진행하고, 주유 시작 49일차에는 ''''주유노트 마감기''''도 내보낸 바 있다.
본인이 4주의 소통을 진행함은 다름 아니라 ''''하늘의 뜻''''을 존중하고, 6자 합의문인 ''''창준위 3호문서''''와 ''''창준위 9호문서''''대로 그리고 2012.6.30.자로 발효조치된대로 ''''高麗聯邦國體制''''가 이제 출범해야 함을 밝히기 위함이었다.
게다가 현재 ''''이해승후손의 특별법 위반건''''은 서울 서부지검에 3차 고소조치(2012.12.초)를 취하는 중이라. 해당사안이 적어도 지난 8.15광복절까지는 ''''순리대로'''' 해결되리라 한편 기대도 했던 것이다.
그러함에도 해당사안들의 해결이 지체되어, ''''28宿''''에 봉해드린 선배들에 대한 불만도 있고 하여, 지난 8.15 광복절을 경료한 8월 18일과 19일에 ''''28宿''''을 교체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본래는 학문과 문화발전을 위해 봉해드린 ''''어찌보면 문약한 양반''''들을 빼고, 외국의 인물을 받아들이려고 ''''주작에 봉할 인물로 새롭게 칭기스칸, 알렉산더, 나폴레옹, 칸트, 괴테, 베토벤, 신채호''''로 확정하고는 18일에 작성하고는 잠에 들게 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에 외부에 일부 공개했듯이 ''''청태조 누르하치 선배가 떡시루를 들고 본인의 조부를 찾아오는 놀라운 선몽''''을 하게 되어, 28숙에 ''''청태조 누르하치선배를 봉해드리라''''는 뜻으로 알고, 일부 인물도 교체하여 최종 ''''칭키스칸, 누르하치, 나폴레옹, 칸트, 항우, 강태공, 신채호'''' 제 선배들로 구성된 현재의 주작으로 교체하게 되었던 것이다.
8.19자로 최종 확정된 28宿의 명단을 밝혀둔다.
소도령 2013-480 高麗聯邦國 28社堂을 봉함
高麗聯邦國 28社堂을 다음과 같이 봉하는 바다.
공자, 최치원, 백이정, 강감찬, 서희, 윤관, 을지문덕
세종대왕, 길재, 김종직,최풍헌, 이이, 진묵, 송구봉
칭기스칸, 누르하치, 나폴레옹, 칸트, 항우, 강태공, 신채호
무학대사, 허준, 이지함, 강증산, 손병희, 신사임당, 김일성
* 남대천에 들러 강릉 단오제가 ''''치우檀君''''(치우단군 생일 음력 5.5.)을 기리는 행사임을 알고 치우단군에게 인사를 드린 후, 남대천 창포다리에 내걸린 깃발이 ''''28개''''임을 보고는 28社堂 또한 봉해야 함을 알게 되었다.
* 네차례 숙의를 거듭하여 확정하는 바다.
* 8.18-19자로 ''''주작의 주인옹을 위와 같이'''' 교체하였으며(백호의 두 인물), 명단은 내외의 상황을 감안하여, 모친 7주기 기일인 9.12.자로 공개함을 천명하오.
* 금일 이후 후대 단군 누구라도 ''''28宿(社堂)''''의 한 인물도 변개하여서는 아니되며, 변개시에 하늘과 땅에 변고가 끊이지 않고 재앙이 이름을 엄중 천명한다.
2013.7.25.(壬辰日 亥時)
주유 19일차에, 영빈장모텔에서
高麗聯邦國
蘇塗廳
48대 檀君
본인의 견해로는 이왕에 올라가신 선배들은 ''''인연을 찾아'''' 다른 곳으로 옮기셨다고 보는 바며, 서양선배들 중 알렉산더선배, 괴테선배, 베토벤선배등은 모두 ''''칸트선배의 별자리''''로 가셨으리라 봄을 밝혀 두는 바다.
2013.8.31.
高麗聯邦國
蘇塗廳
48대 檀君
참고문헌
1. 주유기 7부작
(1). 목멱산 와룡묘(臥龍墓, 제갈공명묘)를 둘러보며(작성일:7.13): (2).유랑 14일차에 북한강과 남한강이 만나는 ''''두물머리''''를 둘러보며 소회하다(7.20.): (3) 周遊 15일차에 登龍門하다(7.22.)
(4)高麗聯邦國 7社堂을 봉하다(7.22) (5)登龍門행이후 홍천행과 양양행에 들었소!!!(7.23.)(6)일곱번째 주유기: 속초 해맞이 공원을 거쳐 정동진 모래시계를 둘러보다 (6편이다.7.25.)(7)삼칠일간의 주유행을 마치며-경포대에 올라 시름을 잊다-(7.27.)
주유기는 날짜별로 ''''있었던 사실''''을 述而不作의 원칙에 입각하여 그떼그때 짤막짤막하게 내보낸 자료이며 주유 7일차부터 나가기 시작하여 21일의 주유기간 중 7차례 정리하여 내보낸 자료들이다. 한편, 그에 대한 첫번째 해설자료가 아래의 ''''7사당과 28숙을 봉하게 된 경위에 대해''''이며, 이 자료가 체계적 해설을 붙인 자료라 보면 될것이다.
2. 7사당과 28숙을 봉하게 된 경위에 대해
3. 무학비결
4. 채지가